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 예수님은 왜 죄 없이도 세례를 받으셨을까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 예수님은 왜 죄 없이도 세례를 받으셨을까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 예수님은 왜 죄 없이도 세례를 받으셨을까

 

마태복음 3장에는 오래 질문을 남기는 장면이 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으로 오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조차 "내가 당신께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라며 말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Suffer it to be so now: for thus it becometh us to fulfil all righteousness." (Matthew 3:15)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이 짧은 대답 안에 개혁주의 신학이 오랫동안 고백해 온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입니다.


1. 두 가지 순종이란 무엇인가

개혁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두 측면으로 설명합니다.

능동적 순종은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는 동안 하나님의 율법을 한 점 흠 없이 완전하게 지키신 순종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실패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마음과 말과 행동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수동적 순종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순종입니다. 여기서 '수동적'은 소극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고난을 받다'라는 뜻의 라틴어 patior에서 온 말로, 고난받으심의 순종을 가리킵니다.

흔히 이렇게 비유합니다. 수동적 순종은 우리가 진 빚을 대신 갚아 주신 것이고, 능동적 순종은 텅 빈 우리의 통장에 그리스도의 의를 가득 채워 주신 것입니다.


2. 왜 죄 사함만으로는 부족한가

십자가로 죄 사함을 받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가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중요하게 고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 사함은 마이너스를 0으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지 죄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이룬 '의'입니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것도 금지된 일을 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아담과 그리스도를 나란히 놓고 설명합니다.

"For as by one man's disobedience many were made sinners, so by the obedience of one shall many be made righteous." (Romans 5: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죄인이 되었듯,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의인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 대신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기에 그 의가 믿는 자에게 옷 입혀지는 것입니다.


3. 마태복음에서 보는 능동적 순종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 첫걸음부터 이 순종을 보여 줍니다.

3장의 세례가 그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과 같은 자리에 서서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물속에 들어가셨습니다. 하늘에서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3:17)라는 음성이 들린 것은 그 순종에 대한 아버지의 기쁨이었습니다.

4장의 광야 시험이 이어집니다. 아담은 풍성한 동산에서 넘어졌고, 이스라엘은 사십 년 광야에서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십 일을 굶주린 광야에서 세 번 모두 "It is written"으로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아담과 이스라엘이 실패한 자리를 예수님이 순종으로 다시 걸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5장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Think not that I am come to destroy the law, or the prophets: I am not come to destroy, but to fulfil." (Matthew 5:17)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는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삶 전체가 우리를 위한 율법의 성취였음을 보여 줍니다.


4. 마태복음에서 보는 수동적 순종

이 순종은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오심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Even as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ministered unto, but to minister, and to give his life a ransom for many." (Matthew 20:28)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는 기도 끝에 예수님은 "nevertheless not as I will, but as thou wilt."(26:39)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억지로 끌려가신 길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신 순종의 길이었습니다.


5. 나뉘지 않는 하나의 순종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은 시기로 딱 잘라 나뉘는 두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평생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 역시 가장 적극적인 순종이었습니다. 한 분의 한 순종을 두 측면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앙고백들은 이 두 측면을 함께 고백해 왔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70문은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근거를 "the perfect obedience and full satisfaction of Christ", 곧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온전한 속상이라고 말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0문도 그리스도의 온전한 속상뿐 아니라 그분의 의와 거룩함이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고백합니다.

교회 역사에는 십자가의 순종만 전가된다고 본 견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죄 사함은 받았어도 하나님 앞에 내놓을 의는 없는 상태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전체가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고백이야말로 복음이 주는 온전한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6. 이 진리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위로

능동적 순종의 교리는 어려운 신학 용어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따뜻한 복음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말씀대로 온전히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하나님께 점수를 따야 하는 시험'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부족한 순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보십니다. 그 의를 옷 입은 자에게도 하늘의 음성은 똑같이 들립니다. "내가 기뻐하는 자라."

그래서 우리의 순종은 구원을 얻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 됩니다. 세례의 강물에서 시작해 십자가에서 완성된 예수님의 순종이, 오늘 우리가 다시 일어설 이유가 되어 줍니다.


📌 말씀묵상 LOOP에서 함께 읽기

말씀묵상 LOOP에서는 마태복음을 한 장씩 KJV 원문 찬양과 한글 해설로 담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본 3장의 세례, 4장의 광야 시험, 5장의 산상수훈을 '그리스도의 순종'이라는 눈으로 다시 읽어 보시면, 익숙한 장면들이 새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 본문의 성경 인용은 퍼블릭 도메인인 KJV(King James Version)를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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